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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건 뿌리가 깊어서다. ‘한류’가 지금처럼 주목받기 전, 만연한 가난과 천대, 억압 속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운 선구자들이 있었다. 연극 평론가이며 독보적 공연사학자인 유민영(88) 단국대 명예교수가 펴낸 ‘인물로 보는 한국 공연예술사’(푸른사상)는 우리 예술의 선각자들이 통과했던 삶과 꿈, 질곡과 성취를 추적하고 그 의미를 탐구한 역작이다. 최근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만난 유 교수는 “지금 활짝 피어난 한류의 꽃은 선각자들의 희생 위에 자라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카드연체 이 책은 그 K컬처가 자라날 첫 ‘밑동’을 떠받친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했다.
◇예술경영 박승필, 뮤지컬 유치진
‘한국 인물연극사’(2006) 이후 약 20년간 연구를 집대성한 3권 1500쪽의 방대한 분량. 판소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한국의 셰익스피어’ 신재효로부터 현대극의 대부 임영웅과 전방위 연극인 김의경 등 잠시만요 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예술가 64인의 숨결이 책장마다 배어 나온다. 풍부한 자료 조사와 관계자 심층 인터뷰가 녹아 있어 하나하나 현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다.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뒤 민족 계몽이 먼저라 생각해 극단을 조직하고 운영한 지두한은 함흥 부농이던 집안 재산을 연극을 통한 민족운동에 다 소진했어요. 유명 배우였다가 보험설계사가 부산씨티캐피탈 된 그 딸을 우연히 만나 우리 공연 최초의 프로듀서라 할 그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었죠. ‘조선 연극계 흥행사’로 불렸던 박승필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직수입해 상영하면서 공연장을 세우고 후원회와 홍보 마케팅 조직까지 운영하며 전통 예술을 보존한 최초의 ‘예술경영인’이었습니다.”



우리은행 신차대출한국 창작 뮤지컬의 효시 '살짜기 옵서예'. /조선일보 DB


지금 각광받는 K뮤지컬의 시초는 ‘한국 연극의 아버지’ 유치진.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접한 뮤지컬이 새 시대의 주류가 될 것으로 보고 1962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포기와 베스’를 처음 공연했다. 이후 임영웅 연출이 만든 최초 할부회선조회 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1966), 김의경의 창작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1977)으로 한국 뮤지컬의 계보가 이어진다.
◇“국가와 민족이 먼저였던 선각자들”
1910년대 신파극 공연 땐 무대 위에서 연기하던 배우가 배고픔을 못 견뎌 졸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마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객석에서 지켜보던 일제 경관이 공연을 중단시키고 잡아 가뒀다. 광대라 천대받고, 권력에 억압받는 예술가들의 역경은 시대를 떠나 한결같았다.
삶의 굴곡도 각자의 이유로 기구하고 절절하다. 초대 주미 공사와 총리대신을 지낸 박정양의 아들이던 박승희는 보장된 풍족한 삶을 내던지고 토월회 연극운동에 투신했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보성전문 법학과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다 춤에 빠진 조택원은 최승희보다 한발 앞선 ‘신무용의 개척자’가 됐고, 일본에서 활동하며 박정희 대통령 때 한일 수교의 막후 역할을 했다.
유 교수는 앞서 ‘북한 연극사’도 펴냈다. 그는 “책을 쓰며 이렇게 고통받은 건 처음이었다. 북한 예술엔 희망이 없더라”고 했다. “책 제목도 ‘김일성 원작 김정일 총연출의 북한 연극사’로 하고 싶었어요. 김일성이 창작했다는 5대 혁명가극도, 김정일의 ‘성황당식 혁명연극’도 체제 선전과 노동력 동원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예술이 배는 못 불리더라도 아름다운 꿈이라도 줘야 하는데…. 연민만 커지더군요.”
유 교수는 “우리 예술의 선구자들은 억압과 멸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돈과 명예보다 늘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했다. 지금 K컬처의 성취엔 그분들의 열정과 희생이 있었다는 걸 함께 기억할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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