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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20년 동안 무명이었지만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코러스를 해도 '관객들이 다 나만 본다'고 생각했죠."
배우 서이숙(59)의 말에는 거침이 없고 긍정 에너지가 넘쳐났다. 무대와 브라운관을 오가며 '신스틸러'로 활약 중인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연기 인생의 궤적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시작은 배우가 아닌 운동선수였다. 고등학교 시절 배드민턴 선수로 활동했지만, 전종합 릴게임
국체전에서 완패한 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우연히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1986년 수원예술극장 문을 두드렸다.
"코러스로 시작했지만 '화술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3년 만에 지방연극제(현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해 서울로 올라갔어요. 그때부터 연극이 본격적으로 제 인생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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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만난 미추극단은 그에게 체계적인 연기 교육의 장이었다. 이후 단원들이 돈을 모아 경기 양주군 백석면에 '미추산방'을 건립해 그곳에서 화성학, 무용, 독서, 감각 트레이닝 등 몸과 마음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당시 소련, 프랑스 출신 연출가들과의 협업도 그에겐 값진 배움이었다.
"몸 각도 하나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걸제이투자
배웠죠. 연극은 말보다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4년 연극 '허삼관매혈기'였다. 남편 몰래 낳은 아이를 키우며 뻔뻔한 듯 당당하게 말하는 '허삼관' 역할은 서이숙의 연기 스타일과 맞아떨어졌다. 이 작품으로 그는 동아연극상과 히서연극상을 연이어 받았다.
"히서연극상 받을 땐 정말 많이 오션파라다이스
울었어요. 20년 연극 인생이 처음으로 인정받는 느낌이었거든요."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화인가 스캔들' 제작발표회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호텔에서 열린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화인가 스캔들'제작발표회에서 배우들이 포즈를 해저이야기사이트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서이숙, 비, 김하늘, 기은세, 정겨운. 2024.7.2. mjkang@yna.co.kr
연극평론가 구희서 선생이 직접 공연장을 돌며 발굴한 '기대되는 연극인상'은 잠깐 반짝이는 배우가 아닌, 꾸준히 가는 배우에게 주어지는 상이었다. 서이숙은 이를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한 순간"으로 회고했다.
그러나 상승세 와중,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모든 수속을 혼자 해결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회복 후 '오이디푸스' 재공연을 준비했지만, 무리 끝에 작품을 포기하고 집에서 오열했다.
"암 수술 때도 안 울었는데… 처음으로 엉엉 울었어요. 그게 제 감정의 밑바닥이었죠."
그 무렵, 회복 중이던 서이숙에게 SBS 홍창욱 감독이 등산 모임 인연으로 드라마 출연을 제안했다. 2010년 '제중원'에서 명성황후 역으로 시작된 그의 드라마 데뷔는 '짝패'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TV 활동으로 확장됐다. 무대에서 닦은 화술과 감정 조절 능력이 드라마 현장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타고난 화술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발표를 즐겼고, 국어 시간 책 읽기를 자청했다. "말이 흐리면 답답해요.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짚는 게 중요하죠." 감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읽는 그의 연기는 늘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연기 철학에 대해 "배우는 자기감정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 전체 작품과 상대 배우, 작가의 의도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기에 있어서도 '이타적인 시선'을 중시한다.
그는 "배우는 10년쯤 지나야 무대에 발이 닿는다"는 말을 믿고 견뎠다. '10년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고, 결국 연극계에서 인정받았다.
"욕심도 있고 질투도 있지만, 오래 품지 않아요. 그 감정에 머물면 배우 인생도 흔들리니까요."
연극 '엄마를 부탁해'에서 열연하는 배우 서이숙(가운데) ['엄마를 부탁해' 팜플렛 발췌]
서이숙은 오전 6시에 일어나 매일 10km를 뛰며 몸을 단련한다. 무더운 날씨에도 포기하지 않는 일상은 그에게 "나 자신에게 안 졌다"는 자신감을 안겨 준다. 사고의 유연성과 어휘력을 키우기 위해 책을 손에 놓지 않을 만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엄마를 부탁해' 공연 때는 신경숙 작가의 책을 다 섭렵했다고 한다.
"배우 서이숙입니다"라는 소개가 부끄럽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배우는 귀한 존재예요. 스스로를 귀하게 여겨야 남도 그렇게 대해요."
2019년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서 '1인 6역' 연기는 인물별로 전혀 다른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대중에게 깊이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현재는 스핀오프 '그랜드 갤럭시 호텔'에 다시 참여 중이며, 요리 타임슬립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도 출연 중이다.
좋은 배우의 기준으로 "연기로 설득하는 배우"를 꼽았다. 김혜자와 이병헌을 예로 들며 항상 관객을 납득시키는 배우라고 평가했다.
서이숙은 최근 어머니와 반려견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 타인의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고, 삶의 의미와 소멸에 대해 성찰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연기 지망생들에게 "배우는 숨 쉬는 것도 공부"라며 "하나하나를 허투루 보지 말고 의미를 갖고 보는 것이 감각 트레이닝"이라고 조언했다.
연극 무대에 대한 애정도 여전히 깊다. "연극은 제 태생이에요. 꼭 다시 할 거예요."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냐고요? 지금처럼 감각 잃지 않고, 행복하게 연기하고 싶어요. 설득력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로요."
phyeon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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