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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제! 다시 강국이 되다 - 중흥군주 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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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다시 강국이 되다 - 중흥군주 무령왕


475년 고구려에 의하여 한성이 함락된다.
백제의 개로왕은 목숨을 잃었다.
한성은 사라지고 백제는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겼다.

웅진시대의 왕들(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은 암살과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무령은 그런 악조건에서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갔다.

무령왕(백제25대왕, 재위 501~523) 은 백제의 중흥 군주였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품고 준비했던 꿈은 벼랑 끝에 놓인 국가의 위기도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무령왕의 등장은 백제에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령왕은 백제가 고구려한테 한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후 맞이한 네 번째 왕이었다.
선왕들이 모두 암살을 당하거나 이름 모를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무령왕의 시작은 안정되고 화려한 출발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위기에 처한 백제를 어떻게 다시 반석위에 올려놓았을까?
무령왕의 파란만장한 그 일대기를 알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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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은 501 12월 웅진에서 왕에 오른다.
그의 정치는 출발부터 위기였다.

이듬해 502년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좌평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좌평 백가는 무령왕의 선왕인 동성왕을 암살한 시해범이었다.

무령왕은 직접 반란군 제압에 나서서 진압작전을 성공한다.
백가가 항복하고 무령왕에게 끌려왔고
무령왕은 그를 베어 백강에 던져버리라고 명한다.

그런데 항복은 바로 죽음인데 백가는 왜 항복한 것일까?
동성왕 시해사건에는 배후세력이 있다는 것을
항거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과연 그렇다면 그 배후 세력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령왕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백제 제24대 동성왕(재위 479~501)은 활을 쏘면
백발백중 명중시키는 무예실력을 갖춘 강력한 군주였다.
그런데 집권 20년을 넘긴 후 백제에 이상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지고 청하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았다.

표면상으로는 백성을 구휼하고자하는 단순갈등으로 비춰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동성왕과 신하들 간의 오랜 갈등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이는 한강 유역에 있던 백제의 수도가 금강 유역으로 바뀌면서
지배세력에도 큰 변화가 생겨나게 되고
이로 인해 지배세력과 동성왕간의 갈등의 조짐이 조금씩 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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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지배세력은 여덟 개의 큰 성씨들이 있었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진씨, 국씨, 목씨, 백씨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 구휼을 주장한 세력은 해씨, 진씨, 목씨, 협씨, 국씨 등
한성시대를 주도한 북방세력들이었다. 그리고 사씨, 연씨, 백씨 는
한성시대의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동성왕이 만든 새로운 세력들이었다.

그중 백가는 15년간 동성왕의 경호실장격인 위사좌평을 지낸 핵심 친위 세력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은 501년 동성왕이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전출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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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는 가림성 근처에서 묵고 있는 동성왕 숙소에 자객을 시켜
왕을 칼로 찌르게 하였고 동성왕은 치명상을 입고 한 달간 고생하다
이로 인해 죽고 만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동성을 시해했던 세력이 무령왕을 추대한 백제 지배층이라고 전하고 있다.
백가와 지배세력간의 결탁은 동성왕이 집권후반기 향락생활에 빠져들면서
그 징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동성왕이 밤새도록 향락 생활에 빠져 살고 백성을 돌보는 것조차 멀리하자
 지배세력들은 무령왕에게 눈을 돌리게 된다.

귀족들과 백가는 그런 민심을 놓치지 않고 동성왕을 시해하게 된다.

무령왕은 귀족과 백가의 추대로 동성왕에 이어 왕이 되었지만
동성왕 시해사건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는 해결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백가의 처형을 단호하게 집행한 것이다.

이는 무령왕이 넘은 첫 번째 정치적 시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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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송산리 고분군 웅진시대 백제 왕족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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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기적에 가깝게 무령왕릉이 발견되는데
1971
년 장마철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벽돌이 발견되는데
그 벽돌을 여는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역사적 사건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무령왕릉은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으로만 여겼던 무덤으로
 도굴군의 손을 타지 않은 유일한 백제왕의 무덤이었다.
그 무덤은 엄청난 백제에 관한 정보를 쏟아냈다.
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3천점이나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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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정교하고 화려한 백제왕의 금관이
처음으로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또한 함께 출토된 왕이 착용했던
귀골이, 은제팔찌 등 백제 문화의 인식을 단번에 바꿔놓았다.

풍습은 부장품을 적게 넣는 탁장풍습이다.

또한 도굴에 취약하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것이 없거나 초라하다고 평을 받았다.
하지만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서
6
세기 전반의 백제의 고급기술, 금속공예기술을 알게 되었다.
만약 무령왕릉이 없었다면 백제 문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낮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400년 만에 우리 앞에 들어난 이 발견은 백제문화의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무령왕릉의 묘지석에 따르면
무령왕릉의 생존 이름은 사마 523 6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462년에 태어나
마흔 살에 왕이 된 것이다. 불혹의 나이 40살이 되어서야 왕이 된 늦깎이 왕이었다.

그런데 묘지석에는 마흔 살 이전, 즉 왕이 되기 이전의 무령왕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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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40살까지의 무령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일본 규수 북부 요부코항, 한반도와 일본의 교역 창구역할을 했던 곳에서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 작은 섬마을에서 무령왕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요부코항에서 뱃길로 10분이면 도착하는 가카라시마라는 섬마을이 있다.
100
여명이 살고 있는 이 섬마을에는 무령왕의 탄생이 전해오는 가당도라는 곳이 있다.

절벽이 파도에 침식되어 생긴 해변동굴이 바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다.

이 섬마을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건너와 이곳을 지나다가 산기가 있어서
여기서 배를 세우고 동굴 속에서 출산했다고 전해내려 온다고 한다.

왜 이 섬마을에서 무령왕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일까?
뜻밖에 일본서기에 그 내막이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은 무령왕은 각라도에서 태어나 그 이름을 사마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묘지석에서 밝힌 출생년도와 일본서기의 출생년도가 거의 일치함에 따라서
 각라도에서 전해 내려오는 탄생설화는 많은 신빙성을 얻고 있다.

그 신빙성을 바탕으로 무령왕의 탄생의 비밀을 밝혀보면

무령왕의 어머니는 신비한 여인이며 일본서기에서 밝힌 무령왕의 아버지는
백제 한성시대의 마지막 왕인 개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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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이 사랑하던 아내와 헤어진 것은 462년 고구려의 침범이 잦을 때였다.
이때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일본에 파견하려고 했다.
이때 곤지가 형수를 데려가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것이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개로왕과 그의 아우 곤지와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결국 곤지와 개로왕의 아내는 일본으로 향하던 도해 도중 산기를 느껴
가카라시마라는 섬에 정박하고 무령왕을 해변 동굴에서 출산한다.

이 설화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혈육으로서
백제왕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이 있는 정통성을 설화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출생과 함께 어린 시절 성장도 신비의 베일에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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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령왕이 백제로 돌아왔다면 백제의 한성의 운명과 함께 하였을 것이다.
475
년 백제의 한성은 고구려의 침공으로 잿더미로 사라진다.
그때 무령의 나이 열여섯 이었다. 한성을 함락시켰던 고구려군은
일본서기에 따르면 국왕 및 왕비, 왕자 등을 모두 죽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 전란에서 살아남은 무령왕은 그 당시 한성에 있지 않았고
일본에 데려가 키웠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령왕을 일본에 데려가 키운 개로왕의 아우 곤지(?-477)는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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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남부 하비키노시 아스카베 마을에서 이곳에서 곤지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해마다 10월 이 마을의 아스카베 신사에서 이 마을의 연장자들이 모여서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1500년간 변함없이 제사를 모시는 그 조상신은 누구일까?
바로 백제에서 건너완 곤지라고 신사 안내판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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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라운 점을
우에다 마사아키(일본쿄토대 명예교수)가 밝히는데
아스카베 신사의 제신은 현재 소사노오스 미코토이지만 일본고서에서는
무령왕의 아버지라고 되어있다. 곤지왕이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로 비춰볼 때 무령왕은 곤지의 아래에서 성장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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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지가 일본에 머문 시간은 약 15년인데 곤지가 아스카지역에서의 미친 영향력이
컸다는 것은 마을 입구에 아스카신사의 정문이 자리 잡을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그 영향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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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는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아스카마을에서는 백제의 무덤군을 쉽게 볼 수 있다.

무덤의 형식이나 무덤에서 발견된 토기가 백제 형식의 토기가 발견됨으로서
그 지역에서의 백제인들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데 수많은 무덤 고분들이
 포도재배단지를 조성하여 훼손하였다. 역사를 민감하게 생각하는 일본이
포도단지를 조성하여 그 고분들을 훼손하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뭔가 감추려는 의도라고 밖에는 그 이상의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죽어서 아스카베의 조상신이 된 곤지는 그가 살던 15년 동안
그 지역에 머물며 아스카베 일대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사람들은 매년 10월 아스카베마스리라는 행사를 통해서
곤지 조상신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무령왕은 상당기간 아스카베에서 곤지와 함께 보냈을 것으로 신비에 가려진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추측해볼 수 있다. 무령왕은 백제에 대려와 피비린내 나는 정사를 지켜보며 결국 왕에 오르게 되면 본격적으로 백제중흥프로젝을 가동시킨다.

그 백제중흥 프로젝트 첫 실행은 달송 우영을 시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지금의 황해도 신계군)을 공격하게 한다.
그런데 이미 백제는 한강을 빼앗긴 상황에서 고구려 수곡성을 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황해도 지역, 한강지역, 그리고 태령산맥 이북 지역은
그 당시 고구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접견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강을 빼앗긴 백제가 수곡성을 공격한 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무령왕의 백제중흥프로젝트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세적 방어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적 전환했다는 점이다.
무령왕의 등극과 함께 고구려와의 대등한 상태에서 백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이로서 백제는 완전히 국력을 회복하고 백제의 부흥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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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실업자조사를 통해 농토개간사업에 실업자들을 투여하고
농업기반 시설도 대대적으로 새롭게 건설하거나 확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전라북도 정읍의 벽골제이다.

하지만 농토 개간 사업은 터무니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가야에게 빼앗긴 기문과 대사를 공격,
섬진강 일대로 진출하는 남진정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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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12년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고 원산성을 격파하였다.

고작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다.
고구려는 무령왕의 적은 군사를 무시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허를 치고 들어간 공격은 고구려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는 대내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을 알리는 분기점이 되었다.

521년 무령왕의 환갑. 백제중흥정책에 성공한 무령왕은 여유가 넘쳐보였다.

그러나 무령왕은 멈추지 않고 놀라운 이벤트를 기획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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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양나라 수도였던 난징, 중국남경시립박물관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제작된 양직공도(당나라에서 파견된 사신들을 그린 그림) 그 사신도에
백제의 사신도가 있다. 무령왕의 국서를 전하려온 백제의 사신이다.

무령왕의 국서 내용은 양나라의 역사서와 삼국사기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를 깨뜨렸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 라며
자신감을 회복한 백제의 위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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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위상은 일본에서 확인된다.
지난 2001 12년 무령왕의 일본에서의 직위를 밝히는 놀라운 기자회견이 있었다.
 
‘나 자신은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라고 일본 천황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본 천황가에 무령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아키이도일본천황의 고백이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황태후의 성은 화씨이고 이름은 신립이다.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무령왕은 일본에 대한 강한 조치를 통해 백제의 정치, 역사 문화권에 묶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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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는 일본에 국보로도 남아있다.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 신사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청동거울이 있는데
그 거울 뒷면에 아홉 사람의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거울 바깥둘레에는 거울의 제작경위를 알리는 48자의 명문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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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받은 사람은 일본의 남제왕, 즉 계체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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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사람은 사마,
무령왕의 지석에서 나온 사마왕(斯麻王)과 획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고대 거울은 상왕이 그 아래 왕에게 내리는 신임의 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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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동북아정세에서 가장 영향력을 펼쳤던 백제 중흥왕인 무령왕은
계묘년(523) 5월 임진일인 7 6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무령왕이 일생의 업으로 삼았던 꿈과 도전을 모두 이뤄내고 백제 중흥왕이 되었다.

즉위 25년간 무너져 가던 백제를 부국강국으로 이뤄냈던
무령왕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사적 사실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준비한 국가발전 전략이
미래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출처http://wkhf.tistory.com/entry/백제-다시-강국이-되다-중흥군주-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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