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쪽 3기의 무덤: 좌로부터 무령왕릉, 6호분, 5호분 우측 길가쪽으로 3개의 묘입구가 보인다.
 5호분, 6호분, 그리고 7호분인 무령왕릉
.jpg)


 1~5호분의 무덤양식인 궁륭상 횡혈식 석실분: 나무로 무덤을 만들고 돌을 쌓은 후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다.
.jpg) 1~6호분은 일제시대 일본인 도굴꾼들에 의해 철저하게 도굴당했다. 이에 반해 7호분인 무령왕릉에서는 엄청난 양의 국보급 유물이 쏟아졌다.




 5월21일 이동코스: 마곡사 -> 무령왕릉 -> 공산성 -> 황새바위

 송산리고분군 글자의 "산"자 바로 위가 7호분인 무령왕릉 "고"자 아래가 사신도로 유명한 6호분, 그리고 "군"자 우측이 5호분
 "백제무령왕릉연문"이라고 쓰여있고 금제관장식이 붙어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수(돌짐승)가 문앞을 지키고 서 있다. 마주보고 있는 인근의 공산성이 문사이로 보인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장식은 송산리고분군의 상징이 되었다


.jpg)

 아래쪽 3기의 무덤: 그림자 진 무덤이 6호분 그림자 진 무덤 위쪽 가장 크게 보이는 무덤이 무령왕릉
 위쪽이 1~4호분... 아래쪽이 5,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 위에서 보니 아래쪽 무덤의 입구도 보인다.
.jpg) 길을 따라 내려오며, 왼쪽 아래로 보이는 무덤입구. 위로부터 무령왕릉, 5호분, 그리고 6호분의 입구
.jpg) 좌로부터 1~4호분 무덤
 계곡 왼쪽 소나무 왼쪽이 1~4호분, 길 오른쪽 아래가 5~7호분.
.jpg) 우측 하단의 큰 입구가 8호분 모형전시관이다 중간쯤 사람들 모여있는 곳이 5~7호분 있는 곳
 6호분 입구가 보이고, 잔듸가꾸기 작업하는 사람들
 5호분,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
.jpg)

 8호분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입구


1971년 7월7일,
기존에 발견되었던 송산리 벽돌무덤 6호분의 유입수를 막기 위해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을 전혀 당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발굴되어서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보통 피장자의 신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도록 만들어진 다른 고분과는 달리 이 왕릉은 내부 석판에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라는 피장자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한 마디로 고분 중에서도 무덤 주인이 자기 이름을 대놓고 쓰고 죽은 희귀한 케이스인 셈이다.
무령왕릉은 충청남도 공주시에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으로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면 송산리 고분군 7호분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무령왕릉마저 도굴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예술품이나 국제무역수준은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며,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기 때문에,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분에 해방 이후 고고학 최대의 발굴로 기록되었다. 또한 중국 양(梁)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 양식의 건축으로 현재까지 고분 연구에도 대대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는 어수룩한 발굴 때문에 후회가 가득한 발굴로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백제의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석판이 발견된 점이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점,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백제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나라의 상호 간에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이 기존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무령왕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2017년에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백제의 제25대 왕 무령왕(501~523년 재위)
(3).jpg)

[백제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지석의 발견]
피장자를 무령왕과 무령왕비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묻힌 지석 덕분이다. 지석이란 사자의 신원이나 묘의 소재 등을 기록하여 함께 묻는 것을 의미한다.
2매가 출토되었으며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묘지 등을 기록한 장방형의 석판이다. 왕의 것과 왕비의 것으로 구분하는데 크기는 세로 약 35cm, 가로 약 41cm, 두께 약 5cm이다.
무령왕지석은 앞면에 왕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묘 위치의 방위를 나타내는 간지도로 구성되었는데 간지도는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교적 색채는 매지권 말미의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는 구절 등 이외에도 몇몇 곳에서 발견된다. (갖가지 추측이 분분했으나) 중국 남조의 무덤에서 유사례가 발견되어 도교의 주문으로 밝혀졌다.
유사한 사례로는 ‘急急如律令’, ‘有天地敎如律令’, ‘有私約如律令’등이 있는데, 이를 기반으로 해석한다면 천신으로부터 (무덤에 쓸) 땅을 매입하였으므로 속세의 율령(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유사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부종율령'과 똑같은 구절은 아직 없기 때문에, 아직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있다.
무령왕비지석은 앞면에 왕비의 사망 및 장례를 치른 일자를 요약한 묘지, 뒷면에 토지신에게 묘자리로 정한 땅을 구입했음을 증명하는 매지권으로 되어있다.
왕비가 왕보다 후에 죽었다. 따라서 왕비의 지석이 제작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먼저 왕의 사후 27개월 간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장 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능에 안치할 때 왕의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을 만들었고, 후에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적은 지석을 뒤집어 왕비의 묘지를 새겼을 것이다.
왕비의 묘지에서 빈전으로 '유지'라는 곳이 언급된다. 시신은 사후 즉시 능에 안치되지 않고 일정기간 다른 곳에 두는데 그곳이 빈전이다. 마침 공산성 서쪽에서 빙고로 보이는 유적이 발굴된 바, 이 유지=빈전이 정지산의 빙고 유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묘실 안에 놓인 두 장의 지석에는 어떤 내용이 새겨져 있었을까?
 왕과 왕비의 묘지석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며, 이는 일본서기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무령왕은 다소 늦은 40세에 왕이 되었고, 62세에 붕어했다.


 귀중한 역사적 사실이 새겨진 지석이 전시되어 있다

[횡혈식 전축분(벽돌무덤) 양식의 무령왕릉]
백제와 교류했던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도입된 무덤양식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제25대 무령왕의 흉상
 무령왕릉 모형입구

.jpg) 1500년 전, 일본에서 자라는 귀한 금송(金松)으로 만들어졌다는 관.
 횡혈식 전축분 양식으로 축조된 무령왕릉 모형도
 무령왕릉 모식도
 디지털로 복원한 무령왕릉. 앞에 석수(돌짐승)가 지키고 서있고, 그 앞에 백제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 두 개의 지석이 놓여있다.
 두 장의 지석에는 역사적 사료가치가 있는 내용들이 새겨져 있었다
 묘실 앞을 지키고 서있는 석수(돌짐승)
 등잔놓는 곳 & 무령왕릉 모식도
 무령왕릉 모형도
 횡혈식 전축분(벽돌로 쌓은 무덤) 형식으로 축조한 무령왕릉 묘입구
 묘실내부
.jpg) 등잔을 놓는 곳

.jpg) 전축분 양식으로 축조된 무령왕릉의 묘실내부: 천정은 아치형이다.
(0).jpg) 전축분(벽돌을 쌓아 만드는 무덤) 만드는 공법: 백제와 교류했던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서 도입되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전축분인 무령왕릉의 연꽃무늬(연화문) 벽돌
 또 다른 형태의 벽돌문양
(1).jpg) 6호분 무덤속의 벽화: 무령왕릉과 같은 전축분(벽돌무덤)
 무령왕릉 왕과 왕비의 관 모식도
 복원된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들었다
.jpg) 관속의 목받침대
 관속의 발받침대

[풍부한 무령왕릉 출토유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무려 108종, 4600여점에 달한다. 이중 17점은 귀중한 국보로 지정되었다. 특히 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은 무령왕릉의 상징이 되었다.
다른 백제고분들이 일제하 전문 도굴꾼들의 도굴로 대부분의 출토유물이 어디론가 사라진 반면에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잘 보존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수한 백제 예술작품 들의 높은 수준과 금속공예기술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발굴초기에 마구잡이로 뒤섞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왕비를 위한 장신구
 왕비가 착용했던, 금으로 만든 관장식, 귀걸이, 목걸이, 그리고 금동신발


.jpg) 왕이 착용했던 금제관장식
 왕관의 부분 명칭
 금으로 만든 관꾸미개
 금제 머리꾸미개
 귀걸이
 귀걸이




 금으로 만든 노리개
 금으로 만든 혁대

.jpg) 은팔찌

.jpg)
 청동거울
 청동거울의 뒷면. 앞면은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서 거울로 사용하였다.
 문양이 정교하고 섬세하다
 특별한 문양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
 용문양이 새겨진 청동거울

 용머리가 새겨진 금속제유물 -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묘실 앞을 지키는 돌짐승(석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