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밸얘 56 - 우리를 슬프게 했던 일
🧑 김개석
📅 2004-01-03
👀 343
멀리 하와이로부터 몰려오는 듯한 장대비가 거의 하루 종일 세차게 쏟아지던 그제 대신에, 아직도 날씨가 꾸리무리하던 2004년 새해의 둘째 날이었던 어제 아침, 본격적인 장마철을 맞아서 우리집 앞마당에 깨끗하게 피어오른, 당신이 살아 생전에 손수 심으셨다는 다년생 백합의 하얗고 청초한 송이들을 따 들고, 장인 어른이 거의 3년째 편히 쉬고 계신 천당의 문(Gate of Heaven)으로 아내와 함께 향했다. 이곳 실리콘 밸리의 전원 도시 로스 알토스의 아름다운 푸른 언덕들 위에 위치하고, 작은 구릉 두 개를 양 옆에 끼고서는 아담한 연못과 시원스런 분수대를 밑으로 내려다 보며 늘상 푸르게 잘 가꿔진 잔디밭에 둘러쌓인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보다도 집에서 먼 거리가 아니므로 틈만 나면 우리 내외가 꽤나 자주 찾는 그런 조용한 곳이기도 하다.
끝도 없이 넓다란 잔디밭 바닥에 가로세로 일정한 간격으로 질서 정연하게 평평하게 박혀 있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비석들 – 멀리서 보면 그냥 모두 평범한 잔디밭으로 보일 정도로 덤덤하다. 언뜻 공동 묘지라는 감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러한 곳이다. 오히려 잘 다듬어진 하나의 공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 바로 옆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지하게 넓고 정말로 아름다운 주립 자연 공원이 쫘악 깔려 있기도 하다. 모든 주변 자연 조건이 이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 아마도 흔치는 않을 것이라는 기분이 문득 들기도 하는 곳이므로, 천당의 문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쩌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그날은 다소 다른 느낌을 받았다. 평소처럼 깔려 있는 알록달록한 각양각색의 꽃들 대신에, 이곳 사람들이 성탄절 때 많이 사용하는 붉은 포인쎄티아가 군데군데 거의 모든 빈 칸들을 인상깊게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때맞춰 좋은 것은 사랑하는 망자와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역시 보편적인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곳에 도착한 즉시로 둘이 서서 간단하게 도착 인사를 하고, 맑은 물을 떠다가 그간 또다시 다소 더러워진 비석을 깨끗이 닦아내고, 장인 어른의 한글 이름과 영문 이름 그리고 출생과 사망 일자가 간결하게 적힌 비석 왼쪽의 한가운데에 뚫린 조그만 구멍을 막고 있는 검은 플래스틱 꽃통도 다시 말끔히 청소하고, 준비해간 백합들을 미리 꽂혀 있던 다른 꽃들과 함께 잘 다듬어서 정성스레 꽂고, 정확하게 세번 절을 했다. 어떤 이들은 그 비석에 생전의 사진을 박기도 한다.
그 비석의 오른쪽은 장모님의 이름과 출생일이 차지하고 있다. 땅 속 깊은 곳에 커다란 뚜껑 달린 대형 콘크리트 외관이 있고, 그 안 밑바닥에 위치한 내관 안에 장인 어른이 계시는데, 나중에 때가 되면 장모님이 그 안의 그 분 바로 위에서 함께 편히 쉬실 예정이다. 원래는 세 명까지 거기 한자리서 차곡차곡 함께 쉴 수 있지만, 그곳에 두 분만이 계시기로 이미 합의한 바이다.
조용히 묵념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쳐든 난 그제서야 바로 앞쪽 가까운 곳에 또 하나의 매장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특수 장비에 의하여 파헤쳐진 직사각형 구멍 속의 열린 콘크리트 외관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 밑에는 두개의 내관이 이미 있음이 분명했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파낸 평면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90세의 엄마와 65세의 아들이 함께 쉬고 있었다. 조용하고 꾸물한 아침이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계속하여 묵념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다시 나란히 서서 상념에 잠겼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검고 낡은 구식 캐딜락 스테이션 왜건 장의차 한 대가 단 석 대의 차들을 조랑조랑 이끌고 갓길에 도착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인 일꾼 네 사람이 녹색 작업복 차림으로 그 장의차 뒷문을 휘익 열고, 하나의 누런 싸구려 목관을 끌어 내려서, 그 구멍 위에 있는 임시 받침대에 올려 놓았다. 무척이나 조그맣고 가볍게 보였다. 옮기는 일꾼들이 무거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아주 쉽게 기우뚱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고,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는 딱한 생각이, 바로 우리 열댓 발자국 코 앞에서 다소 급하게 벌어지던 돌발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게 불현듯 엄습해 왔다. 아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어린애임이 틀림없어.
급기야는, 남편은 어디서 얻어 입었는지 아주 커다란 검은 정장 상의를 대충 걸쳤지만 그 외론 평상복 차림의 젊은 백인 부부 한 쌍과 그들의 귀여운 어린 딸 둘 그리고 그들의 이웃인 듯한 역시 평상복 차림의 나이먹은 백인 한 쌍이 그 구멍 주위에 모여 들었다. 곧 이어, 머리 허연 백인 성직자 한 명이 검은 예복을 입고 성경책을 편 채 그 위에 미리 끼워둔 하얀 백지에 쓰인 판에 박힌 말들을 중얼중얼 성의없이 읽고 있었다. 꽤 지척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들리지도 않았다. 조촐한 하관식 예배였다. 너무나 의외로 초라했다. 역시 어린애임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거의 아무도 없지.
그 순간 난 그 아내의 손에 들린 작은 밤색 동물 인형과 남편의 손에 들린 노란 애들 장화 한 짝과 어린 딸 하나가 움켜쥐고 있는 하얀 동물 인형을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눈짓했다. 저거 좀 봐. 꽃 대신에 저것들을 관 위에 던질라고 하나 봐. 난 그만 돌아 서야만 했다. 눈에 습도가 올라 갔기 때문이다. 아내도 옆에서 조용히 훌쩍거렸다. 다시 돌아서서 아내의 등을 토닥거리는 순간, 저쪽 남편도 나와 똑같이 아내의 흐느끼는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비통할까, 어린 자식을 갑자기 잃은 것도 무척이나 슬플 텐데 저렇게도 초라하게 이별해야 하다니. 우리 일은 아니지만, 우린 어느 사인엔가 그들의 고통을 자연스럽게 함께 나누고 있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상투적인 의식 절차였다. 그 성직자의 예배는 꼭 5분만에 끝났다. 그 흔한 찬송가 한 구절 없었다. 너무나도 간결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성직자가 예배 직후 간단하게 그 구멍 주위의 몇 안되는 사람들과 급하게 악수를 마치고는 그 관이 채 땅 밑으로 내려지기도 전에 휭하니 자기 차를 타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 사실이다. 아니, 아무리 바빠도 죽은 아이에 대한 기본 예의는 갖췄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나까지 그만 순간적으로 자그마한 분노가 차오름을 느꼈다. 가만히 보니, 그 성직자가 떠난 후, 그 아내는 더욱 처절하게 우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깐 돌아서는 순간, 나와 잠시 벌건 두 눈이 마주쳤다.
난 아내와 함께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들 내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어떻게 해서라도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 때쯤은 우리의 눈들도 그녀의 눈들과 같이 일종의 폭포수였다. 그러나 그 남편의 눈엔 약간의 습도만 올라 있었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애비로서는 약간 이상했다고 느꼈지만, 누구든 그 만큼 대범할 수도 있으리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선 간단하게 소개 인사를 하고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의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러나 난 그 말끝을 끝내 맺지 못하였다. 아내가 대신 했다. 그녀도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이해한다는 눈초리였다. 말이 대수인가, 마음만 통하면 되었지 하고 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잠시 있다가 가까스로 나 자신을 추스른 직후, 난, 그저 뜻하지 않은 우리 불청 조문객들에게 애틋하게 슬픈 눈초리로 마냥 송구스러워 하기만 하는 그녀의 남편에게 한마디 불쑥 물었다.
One of your kids? 당신 애들 중의 하난가요?
순간적으로 우물쭈물하는 남편 대신에, 느닷없이 그의 아내가 흐느끼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대꾸했다.
No, my uncle. 아니요, 내(가 사랑하고 가깝게 지내던 한 삼촌) 아저씬데요.
순간, 나와 아내는 각자 속으로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다행히 어린 생명이 아니었네. 아까 그 엄마가 아들 하나를 마저 품 안에 안는 것이구만.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도 이제 그만 멈추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굳이 부연 설명도 했다. 여기는 우리 가족 묘지나 다름없어요. 여기엔 누가 있고 저기엔 누가 있고 하면서 말이다. 그걸 다 듣고난 우리는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침내 그 자리를 다소 홀가분한 기분으로 총총히 떴다. 아침 내내 잠시 멈췄던 비가 달리는 차의 앞유리를 다시 세게 강타하기 시작했다.
타의에 의하여 갑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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