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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원문 발췌
  <DIV align=center> <TABLE style="WIDTH: 527.25pt; mso-cellspacing: 1.5pt" cellPadding=0 width=703 border=1> <TBODY> <TR> <TD style="BORDER-RIGHT: #ece9d8; PADDING-RIGHT: 0.75pt; BORDER-TOP: #ece9d8; PADDING-LEFT: 0.75pt; PADDING-BOTTOM: 0.75pt; BORDER-LEFT: #ece9d8; WIDTH: 519.75pt; PADDING-TOP: 0.75pt; BORDER-BOTTOM: #ece9d8; BACKGROUND-COLOR: transparent" width=693>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FONT size=2><B><SPAN style="COLOR: blue; FONT-FAMILY: 굴림">광개토대왕비<SPAN lang=EN-US> (廣開土大王碑)</SPAN></SPAN></B><B><SPAN lang=EN-US style="COLOR: blue;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SPAN></B></FONT></P></TD></TR> <TR> <TD style="BORDER-RIGHT: #ece9d8; PADDING-RIGHT: 0.75pt; BORDER-TOP: #ece9d8; PADDING-LEFT: 0.75pt; PADDING-BOTTOM: 0.75pt; BORDER-LEFT: #ece9d8; WIDTH: 519.75pt; PADDING-TOP: 0.75pt; BORDER-BOTTOM: #ece9d8; BACKGROUND-COLOR: transparent" width=693>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FONT size=2>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FONT><A title="광개토대왕비석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korean-photo/goguryo/photo5-goanggaitobisug.htm" target=_blank><FONT size=2>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FONT></A><FONT size=2>이다.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FONT></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SPAN></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FONT size=2><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FONT></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FONT size=2>  414년 </FONT><A title="광개토대왕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king/goguryo/king19.htm" target=_blank><FONT size=2>광개토대왕</FONT></A><FONT size=2>의 아들 </FONT><A title="장수왕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king/goguryo/king20.htm" target=_blank><FONT size=2>장수왕</FONT></A><FONT size=2>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FONT></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FONT size=2><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FONT></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FONT size=2><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내용은 크게, ① 서언(序言)격으로 고구려의 건국 내력을, ②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 정복사업의 구체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담았으며, ③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를 서술하여 묘의 관리 문제를 적었다.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FONT></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FONT size=2><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FONT></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FONT size=2>  이를 근거로 일제의 학자는,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FONT><A title="일본서기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world-term/japan/term17-ilbonsugi.htm" target=_blank><FONT size=2>《일본서기(日本書紀)》</FONT></A><FONT size=2>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FONT></SPAN><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o:p></o:p></SPAN></P> <P class=MsoNormal style="MARGIN: 0cm 0cm 0pt"><SPAN lang=EN-US style="FONT-FAMILY: 굴림; mso-bidi-font-size: 10.0pt"><FONT size=2>  즉,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FONT><A title="용비어천가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63-yongbiuchunga.htm" target=_blank><FONT size=2>〈용비어천가〉</FONT></A><FONT size=2>를 비롯해 조선 전기의 문헌에서 간혹 언급한 경우가 있으나 비문을 확인한 적은 없었다. 17세기 이후 </FONT><A title="청나라 창으로 이동" href="http://www.mtcha.com.ne.kr/world-term/china/term137-chung.htm" target=_blank><FONT size=2>청(淸)</FONT></A><FONT size=2>에서 이 지역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간주하여 봉금제도(封禁制度 : 거주금지 조치)를 시행하자 인적이 뜸해져 잊혀진 상태로 있다가, 봉금제도가 해제되고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된 뒤 1880년을 전후해서 재발견되었다. 당시 비가 재발견된 경위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비 발견의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회인현의 지현(知縣)이던 장월(章<?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v:shapetype id=_x0000_t75 stroked="f" filled="f" path="m@4@5l@4@11@9@11@9@5xe" o:preferrelative="t" o:spt="75" coordsize="21600,21600"> <v:stroke joinstyle="miter"></v:stro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