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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주의구간
단풍주의구간 


안영선


풍경은 말의 재단사였을지도 몰라

(단풍주의구간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내비게이션의 낭랑한 소리가 들렸지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골짜기를 품고 있었어
하늘은 온통 바다 빛으로 채색된 날이었을 거야
말은 저속으로만 풍경을 즐기는 시간을 허락했어
아내는 모든 말이 단풍처럼 선홍색이거나 노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풍경은 차창에 가까워질 때마다 선명한 말을 쏟아냈어
저 앞선 곳 고라니 한 마리 풍경에 갇혀 쓰러져 있었지
(야생동물출몰지역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붉게 물든 풍경은 가끔 말을 놓치기도 하나 봐
말을 놓친 풍경이 도로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

단풍주의구간
아내에게서 처음 들어본 말이야
두근대는 아내의 속내를 귀가 먼저 읽어낸 말이지
도로표지판에 없는 말
인터넷에 검색되지 않는 말
풍경이 꼭꼭 숨겨두었다 이 계절에만 끄집어내는 말이었지

아내는 시월이면 단풍주의구간을 달리고 싶어 했어
풍경이 전하는 말을 듣고 싶어 했지


창작단상
아내가 친구들과 가을 단풍을 보러간 날이었다. 내비게이션에서 ‘강풍주의구간입니다’라는 말이 들려왔는데, 가을 풍경에 취한 아내와 친구들은 그 말을 ‘단풍주의구간’으로 읽어냈다. 집에 돌아온 아내의 이야기에 한참을 웃다가 마음 한구석이 뜨끔했다. 말은 풍경이 재단한 의사 표현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말의 원래 주인은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 계간 <문학의 오늘> 10호(2014년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