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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석작가의 병영일기 11회]<바이바이 논산>
<바이바이 논산!> 이미 썼지만 \"28연대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대대도 중대도 소대도 소대원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력이 공황을 일으켰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사내들의 삶에서 평생의 모든 이성간의 사랑이 첫사랑 하나를 능가하지 못하는 까닭과 비슷한 원인으로 생각하고 싶다. 첫경험이 가지는 순수와 열정이 이미 소진된 탓이리라, 28연대의 추억이라면 신형막사의 시설물로 겪은 몇 가지의 괴로움 정도였다.   요즘은 화장실 변기가 좌변기를 넘어 청소년 시절에 듣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상상을 유발시키던 비데로 가는 추세지만, 당시만 하여도 수세식 양변기는 대학민국 문화시설로서 일반화가 되지 않은 문화용품이었다. 그 수세식 양변기가 논산훈련소에 설치되었으니........ 좌변기라는 이상한 괴물을 처음 본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6.25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5촌 당숙이 미국시민으로 귀국하여 인사하러 갔던 곳이 당시의 반도호텔이었다. 방에 딸린 화장실도 신기했지만 처음 본 좌변기는 신기함을 넘어 괴물처럼 보였다. 놀라움과 신기함이 변비 현상으로 발전되어 엉덩이를 붙이는 부분에 발바닥을 붙이고 밀어내기를 해결했었다. 좌변기에서 내가 경험했던 그 변비현상이 용변을 마치고 일어서서 뒤쪽에 물내림줄을 당겨야 하는 수세식 변기는 푸세식 변기에 익숙해온 농촌 출신의 훈련병들에게도 역학반응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역시 28연대의 화장실에도 머리가 보이고 하체는 가리는 반쪽짜리 미닫이식 문이 달려 있었는데, 문제는 오조준의 결과로 변기 주변은 오물로 늘 역겨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장실 사용 방법의 교육은 수시로 이행되었지만 결과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고, 수세식 변기에 사용되어야 할 화장지가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 휴지를 써야 하니 구멍이 막혀 변으로 범벅이 된 물이 복도까지 넘치기가 일쑤여서 불결이 극치에 이르렀다.   농촌출신 훈련병들의 익숙하지 못한 변기 사용으로 요즈음은 \'얼차려\'로 불리워지는 기합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요즈음 겪는 혼란을 견주어보면 우리의 문화 수준도 그 정도가 아닌지? 4백여년에 걸쳐 서구에서 이룩한 산업화를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노력으로 반세기에 축약되었다.   서구의 산업화는 점차적인 부의 형성과 함께 물질에 대한 기대치와 부작용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유물사관이라는 철학적인 체계가 완성되어 요즈음 우리가 겪는 정신적인 혼란을 극소화한 데 비하여 우리는 형이상학적인 유물관이 형성되지 못한 채 형이하학적인 배금주의에 물들어 결국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정신적인 공황에 이른 것이나 아닐런지? 더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몸집은 비데에 올려놀 만큼 넉넉해졌는데 머리 속은 푸세식 변기 속에 원산폭격을 해도 불결하지 않을 정도로 천박한 똥 같은 생각으로 굳어져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송두율이란 간첩의 웃기지도 않는 \'내부적 접근\'이란 주관적인 논리에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이 환호하고 집착하는 것, 또한 철학의 빈곤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강남의 아파트를 다 팔면 미국 땅덩어리를 살 수 있다는 요즘의 부동산 광태를 보면, 그리고 김대중 말년에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미명으로 정책한 부동산 부양책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박정희 이후로 나라사랑과는 먼 도둑놈들만 청와대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아무튼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다는 말처럼 나는 소대원들과 같은 교육을 받고는 있지만 이미 2주나 앞선, 동기들이 이미 훈련소를 떠난 고참(?)이었던 것이다. 칼빈 사격을 위해 실탄이 든 총의 방아쇠를 당긴 기억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칼빈 기록사격은커녕 칼빈을 한 발도 쏘아보지 못했다. 이미 엠원 사격을 마친 뒤여서 긴장감은 별로였지만 군기가 세다는 사격장은 사격장이었다. 기록에 따라 사격을 마치면 기합이 따르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모진 기합조차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휘문 중학교 동기가 마련해준 내 기록은 항상 만점이었던 까닭이다. 처음 칼빈 조준사격을 갔을 때, 소대장은 내 이름을 불렀다. 교도대 사역병 차출이었다. 이름을 지명하여 불러내는 사역병은 별로 경험하지 못했던 터여서 내무반장과 함께 도착한 교도대 중대본부에 가서 비로소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휘문중학교만 나온 동기가 상병을 달고 교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몇 년 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신평식 군이 다니던 약학대학에 자주 놀러가   중앙대학 교정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했던 그는 당시 아모레 화장품의 모델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모 탈렌트와 사귀고 있어 우리 동창들 사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었다. 28연대에 내가 끼어 있는 사실을 안 건 나 모르는 사이에 훈련소 대연병장에서 이루어진 25연대 딱부리 하사의 공개재판으로 기간병들 사이에 나는 꽤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음알음으로 그는 병역카드에 기재된 학력으로 휘문중학교 동기라는 사실을 알고 사격장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묵은 신동아 한권을 주며 교도대 중대본부 내무반에 남겨두고 자신의 근무지로 그는 나갔다. 점심 때는 돌아와 기간병 식당에서 밥을 타다 주고 다시 오후 훈련병들의 사격장 관리를 위해 나갔다. 조준사격과 기록사격이 있었던 이틀간의 호강이었고, 묵은 잡지이긴하지만 군인이 아닌 사람이 사는 사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건 실로 눈물처럼 따스한 행복이었다. 참, 빠뜨릴 번했다. 그에게 병적카드에 기재된 \'12\'라는 주특기가 기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2\'라고 다 기갑병이 되는 것은 아니고 후반기 교육인 기갑학교를 가야 하는데, 기갑학교 교육에 대해서는 그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12\'라는 주특기의 정체를 안 것만으로도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이 늘 불안한 것은 미래를, 그리고 마침내 마주칠 사후를 알지 못하는 까닭일 것이다. 훈련소가 끝나고, 어떤 과정을 가야 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침투 훈련을 마지막으로 모든 훈련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침투 훈련은 보병 분대전술을 적용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실전과 같은 교육이었다. 화염이 치솟고 지뢰가 폭파되는 적전지대를 은폐 엄폐를 이용하여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을 이용하여 철조망을 통과하고, 마지막 적지에 뛰어 들어 가상 북한군을 상대로 총검술로 퇴치하는 훈련소 훈련의 종합편이기도 했다. 침투 훈련을 마치고 예비일이란 하루를 빈둥거리며 관물과 병기를 손질하여 반납하고 마지막날 대연병장에서 퇴소식을 거쳐 배출대에 도착했다. 퇴소식에서 나가기 전에 우리는 훈련병이란 명칭을 떼고 소위 말하는 작대기 하나 계급장을 받아 이등병이 되었다. 배출대에서 제일 먼저 호명되어 불려간 병력들이 금화 27연대로 가는 보병 후반기 교육생들이었다. 훈련을 끝냈다는 즐거움은 단 이틀뿐이었다.   나 역시도 이름이 불려져 저녁을 먹고 배출대에서 지급받은 군복과 개인용품이 담긴 떠블백을 메고 80여명과 함께 논산역전으로 갔다. 해가 떨어지고 8시쯤에 기차에 올라탔다. 서 있는 이등병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내일에 만날 미지의 불안을 침묵에 담고 출발을 기다렸다. 기차는 9시쯤 흐릿한 불빛이 가물거리는 논산을 뒤로 천천히 밀어내며 출발했다. Bye bye 논산! 어둠 속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으로서 버려졌던 자존심과 상처를 그 한숨으로 씻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논산과 이별했다.   이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논산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