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석작가의 병영일기 9회]논산 광주<소원수리2부>
🧑 이율영
📅 2004-10-16
👀 495
9월 20일, 경주에서 혼사가 있었습니다.
경주 근처에 있는 정신병원 원장님의 막내딸의 결혼식이었습니다.
하루 더 묵고 가라는 원장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터미널에 도착하니 6시 30분발
마지막 고속버스가 금방 출발한 뒤였습니다.
심야우등이 23시 40분과 24시 10분에 있더군요.
예매를 하고 5시간 조금 모자라는 기다림을 때울 길이 막막하여
고프지도 않은 배를 앞세워 경주에서
제일 흔한 쌈밥집에 들어갔습니다.
1인분에 7천원인데, 반찬그릇 수가 23개이더군요.
밥 한 그릇. 시래기 된장국, 콩장, 두부조림, 콩나물무침, 취나물무침, 제육볶음, 멸치 볶음, 콩잎 장아찌, 조기새끼 한 마리, 계란찜, 시골음식점에 가면 빠지지 않는 사라다. 게장, 멸치젓, 조개젓, 된장찌개, 우거지 찌개........
쌈은 소꾸리와 접시에 나뉘어 나왔는데 소꾸리에는 야채류의 쌈이,
접시에는 다시마, 양배추, 배추잎 데친 쌈과 호박잎이 올라 있더군요.
밥은 남기고 소주 2병을 비우는 동안
어디선가 우리의 국악이 시끄럽게 들려오더군요.
기생집에 앉아 한정식을 먹는다는 기분을 맛보기에는
소리가 너무 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요즘 경주에서 문화 엑스포가 열리고 있죠? 그 행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식점 옆에 있는
천마총이 있는 오릉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주에서 쌈밥집 만큼 흔한 것이 경주빵이라고 불리는
황남빵집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노동시청 옆에 있는 황남빵이 원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가 바로 경주의 황남동이거든요.
아무튼 집사람이 황남빵을 좋아하여
30개가 든 1만5천원짜리 한 통을 사들고 오릉엘 들어갔습니다.
대낮에는 입장료 1,500원을 받는 곳인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중학생일 때, 경주를 보여주러 갔다가
석굴암 입장료가 경주에서 파는 핫도그와 같은 2,000원이어서,
딸아이가 석굴암의 관람 가치가 핫도그와 맞먹느냐는 질문을 해
난감했던 기억이 문득 나더군요.
아무튼 <우리 가락 우리 노래>란 표제가 붙은
국립국악단의 공연이었습니다.
중간에 안치환이 \'솔아 솔아 푸른 솔아\'와 \'내가 만약\'이란
대중가요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리의 잔치였습니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젊은 스님 5명이 연주한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악기 구성은 대북과 소북 징 장고 등이었는데
언젠가 본 \'난타\'보다 더 흥취가 나고
저절로 추임새가 터져나오는 가락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을입니다.
굳이 국립극장이나 예술의 전당에서
비싼 관람료를 내고 보는 공연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많은 전시회와 무료 공연들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 찌들은 삶의 무게로 가슴 어딘가로 잠수한
예술혼을 일깨워 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소원수리를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답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소원 수리 2부>
\"키가 아담하고 눈이 동그란 내무반장이란 전라도 말투의 하사를 따라 25연대 3중대 3소대\" 막사로 향했었다고
<논산훈련소 25연대 3중대>에서 썼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서 입고 온 사제옷은 팬티까지 모두 벗겨져
나이롱끈으로 꽁꽁 묶어 집주소를 쓴누런 종이에 싸여
우송될 소포가 되어 모아져 중대본부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소대장은 서울에서 가져온 돈들을 모두 내놓으라!\"고 했으나 우리는 아무도 돈을 내놓지 않았었다.
절대 권력자인 소대장이 \'동작그만\'을 시켜놓고 한번만 우리들의 몸을 뒤졌다면 집에서 가져온 비상금을 모두 털렸을 것이다.
그러나 소대장이나 내무반장은 굳이 우리를 뒤짐하지 않았다.
훈련소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내무반장이 그처럼 \'인간적\'일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아야 했다.
분명히 우리는 가진 돈을 중대본부에 맡겼거나 맡긴
무일푼인 훈련병들이어서 훈련소 PX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료들은 알음알음으로 PX 출입을 하고 있었다.
내무반장은 \'다른 소대 내무반에서는 훈련이 끝나고 오면 내무반장에게 후레바를 한 병씩 갖다 바치는데 우리 내무반은 그건 것도 없다\'며 투덜거려 음성적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이 시작된 토요일 훈련병의 대표격인 향도가
분대장들을 은밀히 소집시켰다.
내무반장이 외출을 한다며 외출비를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향도는 분대원들엑게 1인당 1백원씩 걷자고 제안했으나
나는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다.
하수도에서 밥알을 건져 먹는 그들에게 1백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고, 또 그들이 1백원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분대장끼리 1천원씩 부담해서 5천원을 주자!\'는
나의 의견으로 결론지어졌다.
두 번째 토요일이 되었을 때, 분대장은 또 외출비를 요구해왔다.
우리는 다시 모였다.
이번에 나의 결론은 거절이었다.
이번에도 준다면 다음 주에 또 줘야 하고
마지막 주에도 또 줘야 한다. 그리고 5천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미 말했지만 내가 대학 입학할 때 교복비까지 포함해서 낸
입학비용이 1만2천7백원이었고,
무교동 낙지 한 접시가 70원이던 시절이었다.
이미 10일에 받은 우리 4십여명인 소대원의 급료 총액도 5천원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종로구청이 된 수송초등학교 시절
3층이던 건물에 4층을 올리면서 학부형들에게 찬조금을 걷었는데,
어머니가 냈던 금액이 5천환이었다.
덕분에 140명 중 30등 과 20등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성적을
10위권으로 올라가게 했던 것도 5천환이었다.
우리가 내무반장에게 넘겨준 5천원은
1962년 6월 10일에 단행된 화폐개혁을 감안한다면
5만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제대하던 1971년 1월 10일에 받았던 내 군대의 마지막인
내 봉급이 720원이었던 걸 감안해도
5천원은 분명히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내무반장은 우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일요일 저녁
외출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취침중이던 소대원을 전부 깨워 앉혔고,
그에게 호명된 나는 뻬치카 옆에 앉은 그의 앞에
팬티 차림의 부동자세로 섰다.
그는 횡설수설 훈계했는데, 요점은 건방지다는 것이었다.
가끔 휴식시간에 빵세를 뒤적이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외출비를 거절한 감정적인 대응으로 느껴졌다.
그가 지정한 건방짐의 댓가는 엎드렷 뻗쳐 상태에서 빳다 50대였다.
빳다는 군용침대 마후라였다.
맞을 때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매의 횟수를 큰소리로 외쳐야 했는데
\"서른넷!\"이 마지막 기억이다.
나중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이후에 나는 졸도했고,
졸도한 나를 꾀를 부린다며 그는 40대까지 채웠다는 것이다.
이튿날, 나는 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아니 나갈 수가 없었다.
텅빈 내무반 깔린 매트리스에 누워 앓아야 했다.
매도 매였지만 멍자욱과 함께 써비스로 정신 차리라고 부어댄
찬물세례 때문에 얻은 감기에 몸살이 겹친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점호 때는 서있을 수가 없어 앉아 점호를 받아야 했다.
화요일에도 나는 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수요일에도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점심 무렵, 내무반에 잠들어 있던 나를 누군가가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나가보니 막사 앞에 중대장 찦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를 깨운 기간병은 중대장 찦차의 운전병이었다.
실려간 곳은 PRI 교장.
소대원들은 교육을 중지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대원들 앞에 서 있는 군인들은 조교나 교관이라는
고딕체 글자가 박힌 화이버를 쓴 군인들이 아니었다.
일반 군복차림의 그들은 내가 도착하자
소대원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돌렸다.
\"훈련소에 입소한 뒤 기간병으로부터 금전을 요구받은 적이 있는가?\"
\"부당하게 구타당한 적이 있는가?\" 따위의 질문이 있었고
\"있다( ) 없다( )\"에 ㅇ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있다에 ㅇ표를 하면 그 다음 넓은 공간에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진술하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소원수리서였다.
나는 \"없다(ㅇ)\"표를 함으로써 잠시라도 빨리
내무반에 돌아가 쉬고 싶었다.
우리들이 쓴 소원수리서는 걷은 그들은 내가 쓴 것을 뽑아 확인하더니
나를 불러 앞에 세우고 바지를 내리게 하여
엉덩이쪽을 소대원들을 돌리게 했다.
그는 물었다.
\"여러분은 이 퍼런 자욱이 무슨 자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김원석 훈병의 엉덩이에 이런 자국이 남았는가를 쓰십시오! 여러분이 사실을 쓰지 않으면 훈련소의 부정은 계속되고 여러분의 후배들도 여러분과 같은 부당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는 다시 주어진 소원수리서의 칸을 새로 채워야 했다.
내가 당한 부정한 대접을 내 대(代)에서 끊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울분으로 소설을 쓰듯 상세히 썼다.
내가 다시 소원수리서를 쓰는 동안 헌병차가 왔고,
내무반장은 무참한 표정으로 헌병차에 실려갔다.
그리고 나는 중대장 찦차에 실려 훈련소 의무대에 도착했고,
입실되었다.
의무관이 내린 진단의 결과는 폐염이었다.
결국 나는 논산훈련소 25연대 5대대 3중대 105기
훈련병 대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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