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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 선배님을 아시나요?(이하 퍼온 글입니다)
퍼온 글입니다 내가 찾은 상허 - 이태준과 증언자들 - 이기형 - 필자는 지금까지 3회에 걸쳐 월북작가 임화, 오장환, 이기영 세분에 대한 상봉기를 썼다. 독자 중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선생님은 작가를 만나러 가는데 왜 작품을 들고 가지 않고 민 손으로 갔습니까?”이 질문은 내 문학관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볼까 한다. 나는 문학지망생 초기에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범인을 뛰어 넘는 대단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 글재주가 있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 지식도 남달리 많고 인간사,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굉장한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개인이 다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뒷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소설가나 시인이 되려면 우선 공부를 많이 하고 세상 만사에 능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실제로 소설이나 시를 써보는 일을 뒤로 미루었던 것이다. 습작 위주로 나가는 다른 문학지망생과는 반대되는 태도였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문학을 하겠다고 생각을 굳힌 것은 물론 문학이 좋아서였지만 다른 편에서는 문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시켜보겠다는 생각이 엉뚱하게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습작을 서두르지 않은 것은 조선독립에 대해 고민하고 뭔가를 하는 것이 작품습작보다 더 중요하고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습작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소설가나 시인 당사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과 의욕은 대단했다. 나는 함흥고보를 졸업한 후 약 1년 간 월급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태준이 발행하는 『문장』을 다달이 사보고 그의 작품을 탐독했다. 「영월영감」, 「복덕방」, 「가마귀」, 「달밤」 등을 읽은 뒷맛은 유별났다. 당시 『문장』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짓밟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고맙고 눈물겨운 생명수였던가. 그러나 그 『문장』도 얼마 안 가서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필자가 상허 이태준(商虛 李泰俊) 선생을 처음 찾은 것은 1943년 여름날 아침이었다. 임화 선생을 만난 지 얼마 후다. 그 당시 몽양 여운형 선생은 소위 유언비어로 청년 학생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고 헌병대에 끌려갔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직후였다. 1943년이라면 일제가 패망하기 2년 전으로 저들이 최후 발악을 하던 최악의 민족수난기였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일이다. 그때로부터 무려 한 갑자(甲子) 긴 세월이 저며 갔다. 그 당시의 민족수난과 오늘의 분단 고통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메일 뿐이다. 애간장이 짜릿짜릿 찢겨나간다. 감개가 깊은 게 사실이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런 감회 따위에 젖어 볼 찰나조차 주지 않는다. 식민지 36년과 분단 58년이라는 상승적 중압 세월이 우리 반쪽 민족을 이렇듯 수난과 고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짓눌러 대고 있다. 나는 지금 상허의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시도할 생각은 없다. 다만 카프문학의 대표작가를 민촌이라고 할 때 기교파인 9인회의 대표작가 상허를 머리에 떠올려 볼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상허를 기교파 일생으로만 몰아붙일 수는 없다. 소설 『사상의 월야(思想의 月夜)』가 신문에 연재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된 사실과 그의 월북 행위가 이를 증명해 준다. 1943년 당시 종로 쪽에서 성북동으로 가려면 전차를 타고 삼선교에서 내려야 했다.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길바닥 레일을 달리는 전차는 을지로 4가(그 당시 황금정 4가)에서 돈암동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당시 전차표는 한 장에 5전이었다. 삼선교에서 내려 성북동 골짝을 향해 걸었다. 지금처럼 집도 그리 많지 않았다. 개울물이 맑게 흐르고 있었다. 왼쪽으로 옛 성터가 보이고 북악산 줄기가 싱싱 푸르게 앵겨왔다. 여름날 아침이라 공기는 유난히도 맑아 하늘을 날 듯이 가슴이 시원했다. 임화 선생이 알려준 대로 골짝을 꽤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집은 그다지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 왼쪽으로 돌아 가려고 할때 개울 건너 오른편 산 아래에 외딴 기와집 한 채가 고풍스레 앉아 있었다. 그게 바로 당대의 소설가 이태준의 집이었다.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맑은 개울 돌다리를 건넜다. 기와를 얹은 쪽대문을 밀치고 마당에 들어섰다. 푸른 나무며 꽃들이 눈에 띄었다. 왼편에 볏짚지붕을 인 단칸 독채가 오뚝 서 있었는데 ‘상심루(賞心樓)’라는 가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오른쪽 전면에 ‘■’자 안채가 보였다. 상심루 기둥이나 서까래는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통나무였다. 상허의 아취를 말해주는 집필실이었다. 상허 선생은 막 아침 밥상을 물리는 참이었다. 널마루에 나와서 아침 불청객을 맞아 주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모시옷 한복 차림이었다. 마루에는 나무난간이 아기자기 둘려져 있었고 문 위 도리 밑에는 ‘죽간서옥(竹澗書屋)’, ‘문향루(聞香樓)’ 등 가로쓰기 현판이 서너 개 걸려 있었다. 내가 들어간 안방 한쪽 구석에는 병 항아리 등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로 보이는 골동품이 수북히 놓여 있었다. 작가 이태준의 첫인상은 고요하고 점잖았다. 푸르스름하고 잔잔한 눈매는 상대를 안심시켜 주었다. 목소리는 맑고 정확했는데, 그 음향은 목판 위에 구슬이 또르륵 또르륵 구른다고나 할까, 말소리가 입안에서 구르면서 들려 나왔다. 하여튼 여타 사람들한테서는 좀처럼 얻어듣기 어려운 개성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90세를 바라보는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도 어느 누구한테서도 상허와 같은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부인의 인상은 고요한 고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날의 대화내용은, 그의 단편을 읽은 소감을 말했고 몇 가지 질문도 던졌다고 기억된다. 또 내가 지방에 살면서 쥐꼬리만한 수입으로도 『문장』을 꼬박꼬박 사 본 것은 내 자신의 문학수업은 물론이고 우리 말과 글을 살리려는 발행자의 어려운 경영사정을 도와드리려는 심사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먼저 일어서 나오려고 하니까 선생은 자기도 문안으로 들어간다면서 같이 떠나자고 했다. 상허는 개울을 건너 삼선교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앞산 낮은 고갯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헌칠한 허우대가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정정한 소나무가 꽉 들어섰고 싸리나무, 가죽나무 등이 무더기 무더기로 푸르러 반겨 주었다. 길바닥은 흰흙과 왕모래가 안성맞게 섞이어 걸음 감각은 여간 시원하지 않았다. 매미는 머리 위에서 한가로이 울었는데, 그러나 그때 그 소리는 내 귀에는 분명 고달픈 민족의 앓음소리로 들였다. 상허도 아마 그렇게 들었을 줄로 안다. 비단같은 문장으로 주옥같은 단편들을 속속 창작해내던 당대의 대문사와 흥취 짙은 고갯길을 넘는 문학청년인 나는 숨막히는 세월 속에서도 잠시나마 마음이 어지간히 흥겨로왔다.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도 그날의 회상은 내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아로새겨져 있다. 8․15 해방이 되자, 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서, 현대일보사에서 혹은 문학가동맹에서 나는 상허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해방 초기의 많은 집회 과정에서 상허는 명사회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어려운 회의라도 부드럽고 원만하게 이끌어나가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상허가 월북한 것은 1947년 9월경 임화, 김남천 일행과 행동을 같이한 듯하다. 1989년 2월 ‘소설가의 고향’ 일환으로 나는 상허 이태준의 고향을 탐방해 보고픈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의 고향이 철원이라는 말은 진작 듣고 있었지만 철원 어디인지는 전혀 몰랐다. 김규동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서음출판사에서 간행한 『이태준 선집』에 있다면서 출생지는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라고 일러준다. 곧 서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부천공전 민충환(閔忠煥) 교수한테 물어보면 잘 안다고 했다. 곧 바로 민 교수를 찾아갔다. 민교수는 부천공전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상허연구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MBC 방영 <명작의 고향> 촬영차 일전에 상허의 고향인 철원읍 율이리 용담(栗梨里 龍潭)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수유리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동송(東松)행 좌석버스를 타고 철원읍에 가서 조병준(趙炳俊, 84)씨를 만나보라면서 전화번호까지 알려준다. 1989년 2월 4일 이른 새벽 동송을 향해 떠났다. 오전 9시 20분 동송착. 서쪽에 금학산(金鶴山, 940m)이 우뚝 솟아 있었다. 조병준 옹은 연세에 비해 아주 정정했다. 이태준의 동향 동문 후배다. 이태준에 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서 아버지 이창하(李昌夏)씨와 어머니 송(宋)씨 사이에서 일남으로 태어났다. 태준 아기는 생후 얼마 안되어 철원읍 율이리(栗梨里) 용담(龍潭)부락으로 이사를 왔다. 태준에게는 누이 정송(貞松)과 누이 동생 선녀(仙女)가 있었다. 누이는 이북에서 생사를 모르고 누이동생은 서울에서 살다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다. 아버지 이창하 옹은 개화당원으로 태준 아기가 다섯 살 때 온 가족을 이끌고 아라사땅 해삼위(海蔘威)로 부랴부랴 떠났다. 그러나 태준 어린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아버지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어린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만삭의 불편한 몸으로 귀국의 뱃길에 올랐다. 배 안에서 둘째 딸 선녀(船女 이후 仙女)를 낳았다. 고향 용담부락으로 돌아온 어머니마저 산후증으로 세상을 뜨자 태준 삼남매는 일시에 비운의 고아가 되었다. 큰 당숙 이봉하(李鳳夏)씨와 작은 당숙 이용하(李龍夏)씨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세 고아는 잘 자랐다. 뒷날의 소설가 이태준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기구했다. 태준 어린이는 큰 당숙이 세운 봉명학교(鳳鳴學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