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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독할 만 하다..
작성자 이성주
등록일 2009-12-23 11:19:57
조회수 935
- [김우창 송년 특별인터뷰]“좋은 사회 핵심은 ‘안거낙업’… 사람 사는 문제 관심 가져야”
-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
대담 | 김민아 특집기획부장
김·우·창. 그의 이름은 한 시대를 꿰뚫고, 나아가 또 다른 시대를 내다보는, 도저한 지성의 상징이다. 흑이 아니면 백, 보수가 아니면 진보인 세상. 중간지대를 좀처럼 용납지 않는 땅에서 그는 ‘용기있는’ 회색인을 자임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임을 일깨웠다. 2003년 12월4일부터 지난 3일까지 격주로 경향신문에 집필한 ‘시대의 흐름에 서서’는 인문주의자로서의 통찰을 보여준 명칼럼이었다. 해외 출장 때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원고를 보내올 만큼, 그는 성실하고 치열한 필자이기도 했다.
6년간의 ‘글 감옥’에서 막 벗어난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지난 16일 이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예상대로 만만찮은 인터뷰였다. 그는 합리적이되 깐깐했고, 친절하되 틈새를 보이지 않았다. 절제된 언어는 은근한 압박으로 다가왔다. 인터뷰는 김민아 특집기획부장이 진행했다.
-칼럼을 마치신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2주에 한번씩 우리 사회의 문제가 뭔지, 한국 사회에 대해서 저울질을 해봐야 하잖아요. 전체적으로 조준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됐지요. 생각을 정리해서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건 늘 힘든 일이지만,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은 찾아보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적용하려면 더 생각해야 할 과제도 생기니까 늘 공부가 됩니다. 특히 생각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데, 생각이 안 풀린다고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내버려두면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각이 진행되지요. 무의식 속에서 생각이 움직이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도 무의식 속에서 생각을 하나요.
“그럼요. 다만 너무 급하게 생각하니까 좋은 결과가 안 나오는 겁니다. 학생들도 너무 많은 걸 한번에 공부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죠. 머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흔히 늙은 사람이 지혜롭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생각을 많이 하는 훈련을 하다보니 저절로 움직이는 부분이 많아서일 겁니다. 제가 최근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는데, 공부해야 한다는 소리를 만날 하니까 청중 가운데 ‘그렇게 고생해가며 공부만 해야 하느냐, 쉬운 방법은 없느냐’고 물어요. 제가 퇴계 이황이 제자에게 쓴 편지를 인용해 대답했어요. ‘공부를 너무 강하게 밀고 나가면 안된다. 어떤 때는 화조도, 산수도 즐기고 그러다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요.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자기가 갖고 있는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지식도, 지성도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식, 지성보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과시가 지배하는 시대 같습니다. 최근 몇십년 사이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가장 간단하게는 한국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돼서 그렇겠지요. 돈을 벌었으니 과시를 해야겠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가 특히 심할 겁니다.”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일까요.
“돈을 벌더라도 일정한 균형감각 속에서 쓸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 별로 없고, 인생에 플러스가 되게끔 쓸 수 있는 감각도 없어요. 지금 서울 광화문광장 해놓은 것만 봐도 우리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잖아요. 우리 문화는 ‘한번 신나게 놀아보자’는 놀이터 문화가 주인 것 같아요. 인생의 심각성을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예술인데 그런 부분은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좋은 사회는 돈을 벌면 우선 사회에 괴로운 사람이 있는가 봐야 하고 그걸 구해주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은 복잡한 게 아닙니다. ‘안거낙업(安居樂業)’이 핵심이지요. 편안하게 자리잡고 살면서 자기 직업을 즐기며 즐겁게 생활하도록 하는 걸 기본으로 해야죠. 그런 걸 (보장)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게 안되는 사람들에 대해선 복지체제와 사회안전망으로 보장해줘야 하고요. 그 다음에는 문화예술을 해야 합니다. 경박한 문화예술이 아니라 심각한 걸 해야죠. 인문학 강좌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뭐냐고…. 어려운 질문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으면 기쁘게 생각하는 게 가장 간단한 답일 거라고 했어요. 구치 핸드백을 사기 위해 열 끼를 라면만 먹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밥을 굶어서라도 그걸 얻으면 그 사람한테는 좋은 거예요. 그러나 단순히 남들도 다 사니까 산다면, 그건 자기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행복한 게 아니겠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알려면 교육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육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지요.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지만 취업률은 높지 않아요. 대학을 나와도 그런데, 대학 안 간 사람들은 자기 일생을 어떻게 기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인 거죠. 고교 교육과정을 짤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평균 학생을 상대로 짜야 해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영재교육 같은 것 안해도 알아서 자기 인생을 잡아갑니다. 옛날부터 우리 사회가 출세를 좋아하거든요. 출세라는 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예요. 누구한테 어떻게 인정받느냐가 중요한데, 사실 동네에서 알아주면 됩니다. 저 사람이 파는 물건은 믿을 만하다, 이렇게 인정받으면 도덕적인 문제도 덩달아 없어지죠. 작은 단위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체제가 되면 좋은데 요즘은 그게 안됩니다. 1등이라는 것도 그래요. 100명 중 1등은 상당히 잘한 겁니다. 500명 중 1등은 우연이 작용한 것이고, 1만명 중 1등은 로또에 가까운 겁니다. 정운찬 총리가 서울대 총장 할 때 지역균형선발제를 만들었는데 그게 진짜 우수한 학생을 뽑은 거예요. 50~300명 정도에서 1등했다면 정말 잘한 거니까요. 단위가 커지는 게 좋은 것 같지만 별 의미 없어요. 작은 단위가 많은 게 좋은데 지금 작은 단위가 없거든요. 생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적 규모(human scale)’를 넘어서서 넓어지고 커지는 게 세계적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처럼 작은 규모의 단위가 빨리 사라진 사회는 없을 겁니다. 전통적 가치가 깨지고 정치 격변을 많이 겪었잖아요. 문제가 크다는 인식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작은 단위, 작은 공동체를 유지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곳곳에서 마을신문이 부활하는 등 작은 공동체 복원의 흐름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주거 문제예요. 주거 이동을 많이 하면 안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30~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소가 같아요. 우리는 주거 이동을 계속 하게 되는데, 이유가 있겠죠. 옛날 주거방식이 좋지 않았던 것도 있고, 부동산 문제도 있고, 과시욕도 있을 겁니다. 처방이 간단하진 않지만 주거의 정착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거 정착이 이뤄져야 동네가 살아나는데, 요즘같이 큰 규모로 조직화된 사회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죠.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이 가능해질까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문화와 사회제도입니다.”
-문화가 문제라고 하셨는데, 정작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은 많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가 필요로 합니다. 우선 대학 교육 과정에 인문과학이 기초 학문으로 들어가야 해요. 우리나라가 미국식 교육제도를 많이 배워왔는데, 이 부분은 더 배워서 고쳐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인문교육이 대학 학부교육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직업교육은 대학원에서 하도록 하면 됩니다. 제도 하나만 고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는 거죠. 무엇이든 한번 만들어 놓으면 고치기가 힘들어집니다. (밥그릇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니까요. 또 하나, 일반 교양으로서의 인문학도 필요합니다. 최근 대학마다 만든 최고위 과정에 인문교양 과정이 많이 개설돼 있고, 사회에서 하는 인문학 강좌에도 수강생이 많아요. 아무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변해도 자기 미래에 대해선 확실한 예측을 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어떤 합리적 사회에서도 점쟁이는 있게 마련인 거죠. 점쟁이를 자주 찾아가지 않으려면 인문적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내 원칙이 이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자신의 행동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보통 사람에게도 인문교양이 필요한 겁니다.”
-현재의 정치상황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경향신문에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서 세종시와 4대강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두 개의 안건을 올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안건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완전히 매몰되어 버리는 게 문제예요. 지금 정권 잡은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을 보도할지 선택할 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게 없으면, 물고 늘어지며 심술 부리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지금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비판을 할 때도 전체적 차원에서 보고 세부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야지, 이상한 속셈이 있다고 비난만 하면 문제가 생기지요. 4대강도 마찬가지예요. 강을 돌봐야 하는 건 틀림없는데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를 갖고 비판해야 합니다.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하면서 운하를 파려 한다’고 비판하는데, (현 정부가) 뭘 어떻게 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잖아요. 진보진영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많은 사람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 또 직업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에 의지할 수 있느냐가 돼야 합니다. 진보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단기적으로 흥분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사람 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4대강 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을 사회안전망 확충에 쏟으면 직접적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돈을 갖고 어떻게 (사회안전망 확충)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느냐를 고민해야지, 나눠주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단계거든요.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측면에서는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이 제도는 이렇게 만들어가자고 해야지 이걸 직접 분배하자는 것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난번 독일 총선에서 (진보파인) 사민당이 (보수파인) 기민당에 졌지요. 유럽 전체로 볼 때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어느 당이나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사민주의로 정권을 잡으려 해봐야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경우도 유럽과 달리 나라가 크고 사회공동체적 유대감이 약해서 사민주의 정책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는데, 실제 미국의 사회안전망이 우리보다 잘돼 있어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자유민주주의 정책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작은 나라여서 누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외면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전통적인 유교정치론이 비록 가부장제, 권위주의, 계급문제 등을 안고 있지만 위정자는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점을 수백년 동안 이야기해왔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자본주의적 체제란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 더 보탠다면, 우리나라에서 진보·보수의 싸움은 진짜 정책싸움보다 지식인 구분의 장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진보 지식인이 보수파를 치고, 보수 지식인이 진보파를 치고…. 대중과는 아무 관계 없이 흘러가요. 진보·보수 싸움이 진보·보수 지식인의 싸움이 되면 안된다는 거죠. 논쟁을 하더라도 대중적 문제를 갖고 해야 합니다.”
-경향신문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해주시지요.
“비판은 당연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가 하는 보금자리주택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던데, 요즘 정치 치고 전시효과를 노리지 않는 정치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문제삼으면 안된다고 봐요. (정책의) 동기도 큰 문제를 삼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동기가 어떻든지 (정부가) 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정말 플러스가 되는지를 봐야죠. 동기가 좋고 결과도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고…. 지금은 좌우를 분명히 나눌 수 없는 시대입니다. 보수세력도 자본주의만 발전시켜 부자만 잘 살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해서 정권 잡을 수 없고요. 어느 쪽이든 다 국가와 국민 전체를 위해서 일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 전제를 일단 받아들이되, 큰 그림을 갖고 얼마나 섬세하게 작은 부분을 비판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을 수십년째 보고 있는데, 영국 여왕이 한국에 왔을 때 한 글자도 보도하지 않았어요. 우리 언론은 떠들썩했지만…. 가디언에 여왕의 방한은 중요한 뉴스가 아니었던 거죠. 김연아 선수가 잘하는 건 박수쳐줘야 하지만, 그렇게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거든요. 이 신문만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 있게끔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체적 그림과 공정성을 갖도록 언론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공정성의 문제에 민감하거든요.”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희망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다면.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가 한 신문 칼럼에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들어갔다. 선진국 멤버가 되었다’고 썼어요. 식민지에서 출발해 DAC에 들어온 것은 한국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낸 거죠.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이 될 텐데, 우리의 빈곤뿐 아니라 세계적 빈곤 문제 해결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을 겁니다.”
김 교수가 말을 맺었다. 나른하게 비쳐들던 햇살은 간 데 없고, 연구실엔 한기가 돌고 있었다. 떠나는 기자 일행을 그는 깍듯이 배웅했다. 노교수는 끝까지 틈새를 보이지 않았다.
김·우·창. 그의 이름은 한 시대를 꿰뚫고, 나아가 또 다른 시대를 내다보는, 도저한 지성의 상징이다. 흑이 아니면 백, 보수가 아니면 진보인 세상. 중간지대를 좀처럼 용납지 않는 땅에서 그는 ‘용기있는’ 회색인을 자임했다. 끊임없이 회의하고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의 소임임을 일깨웠다. 2003년 12월4일부터 지난 3일까지 격주로 경향신문에 집필한 ‘시대의 흐름에 서서’는 인문주의자로서의 통찰을 보여준 명칼럼이었다. 해외 출장 때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원고를 보내올 만큼, 그는 성실하고 치열한 필자이기도 했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지난 1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리잡고 살면서 자기 직업을 즐기며 즐겁게 생활하도록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자유민주주의 정책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면서 진보든 보수든 사람 사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남호진기자
-칼럼을 마치신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2주에 한번씩 우리 사회의 문제가 뭔지, 한국 사회에 대해서 저울질을 해봐야 하잖아요. 전체적으로 조준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됐지요. 생각을 정리해서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건 늘 힘든 일이지만,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모르는 것은 찾아보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적용하려면 더 생각해야 할 과제도 생기니까 늘 공부가 됩니다. 특히 생각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데, 생각이 안 풀린다고 전전긍긍할 게 아니라 내버려두면 마음 속에서 저절로 생각이 진행되지요. 무의식 속에서 생각이 움직이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도 무의식 속에서 생각을 하나요.
“그럼요. 다만 너무 급하게 생각하니까 좋은 결과가 안 나오는 겁니다. 학생들도 너무 많은 걸 한번에 공부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죠. 머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문제가 됩니다. 흔히 늙은 사람이 지혜롭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생각을 많이 하는 훈련을 하다보니 저절로 움직이는 부분이 많아서일 겁니다. 제가 최근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는데, 공부해야 한다는 소리를 만날 하니까 청중 가운데 ‘그렇게 고생해가며 공부만 해야 하느냐, 쉬운 방법은 없느냐’고 물어요. 제가 퇴계 이황이 제자에게 쓴 편지를 인용해 대답했어요. ‘공부를 너무 강하게 밀고 나가면 안된다. 어떤 때는 화조도, 산수도 즐기고 그러다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요. 우리 마음이라는 것도 자기가 갖고 있는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 속도에 맞춰야 합니다. 지식도, 지성도 성숙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지식, 지성보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과시가 지배하는 시대 같습니다. 최근 몇십년 사이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가장 간단하게는 한국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돼서 그렇겠지요. 돈을 벌었으니 과시를 해야겠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가 특히 심할 겁니다.”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일까요.
“돈을 벌더라도 일정한 균형감각 속에서 쓸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 별로 없고, 인생에 플러스가 되게끔 쓸 수 있는 감각도 없어요. 지금 서울 광화문광장 해놓은 것만 봐도 우리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잖아요. 우리 문화는 ‘한번 신나게 놀아보자’는 놀이터 문화가 주인 것 같아요. 인생의 심각성을 적절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예술인데 그런 부분은 굉장히 줄어들었어요. 좋은 사회는 돈을 벌면 우선 사회에 괴로운 사람이 있는가 봐야 하고 그걸 구해주는 조치를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은 복잡한 게 아닙니다. ‘안거낙업(安居樂業)’이 핵심이지요. 편안하게 자리잡고 살면서 자기 직업을 즐기며 즐겁게 생활하도록 하는 걸 기본으로 해야죠. 그런 걸 (보장)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게 안되는 사람들에 대해선 복지체제와 사회안전망으로 보장해줘야 하고요. 그 다음에는 문화예술을 해야 합니다. 경박한 문화예술이 아니라 심각한 걸 해야죠. 인문학 강좌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어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뭐냐고…. 어려운 질문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얻으면 기쁘게 생각하는 게 가장 간단한 답일 거라고 했어요. 구치 핸드백을 사기 위해 열 끼를 라면만 먹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밥을 굶어서라도 그걸 얻으면 그 사람한테는 좋은 거예요. 그러나 단순히 남들도 다 사니까 산다면, 그건 자기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행복한 게 아니겠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알려면 교육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교육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지요.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지만 취업률은 높지 않아요. 대학을 나와도 그런데, 대학 안 간 사람들은 자기 일생을 어떻게 기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인 거죠. 고교 교육과정을 짤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평균 학생을 상대로 짜야 해요. 공부 잘하는 학생은 영재교육 같은 것 안해도 알아서 자기 인생을 잡아갑니다. 옛날부터 우리 사회가 출세를 좋아하거든요. 출세라는 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예요. 누구한테 어떻게 인정받느냐가 중요한데, 사실 동네에서 알아주면 됩니다. 저 사람이 파는 물건은 믿을 만하다, 이렇게 인정받으면 도덕적인 문제도 덩달아 없어지죠. 작은 단위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체제가 되면 좋은데 요즘은 그게 안됩니다. 1등이라는 것도 그래요. 100명 중 1등은 상당히 잘한 겁니다. 500명 중 1등은 우연이 작용한 것이고, 1만명 중 1등은 로또에 가까운 겁니다. 정운찬 총리가 서울대 총장 할 때 지역균형선발제를 만들었는데 그게 진짜 우수한 학생을 뽑은 거예요. 50~300명 정도에서 1등했다면 정말 잘한 거니까요. 단위가 커지는 게 좋은 것 같지만 별 의미 없어요. 작은 단위가 많은 게 좋은데 지금 작은 단위가 없거든요. 생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적 규모(human scale)’를 넘어서서 넓어지고 커지는 게 세계적 추세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처럼 작은 규모의 단위가 빨리 사라진 사회는 없을 겁니다. 전통적 가치가 깨지고 정치 격변을 많이 겪었잖아요. 문제가 크다는 인식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작은 단위, 작은 공동체를 유지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곳곳에서 마을신문이 부활하는 등 작은 공동체 복원의 흐름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주거 문제예요. 주거 이동을 많이 하면 안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30~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소가 같아요. 우리는 주거 이동을 계속 하게 되는데, 이유가 있겠죠. 옛날 주거방식이 좋지 않았던 것도 있고, 부동산 문제도 있고, 과시욕도 있을 겁니다. 처방이 간단하진 않지만 주거의 정착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거 정착이 이뤄져야 동네가 살아나는데, 요즘같이 큰 규모로 조직화된 사회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죠.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이 가능해질까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문화와 사회제도입니다.”
-문화가 문제라고 하셨는데, 정작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은 많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사회가 필요로 합니다. 우선 대학 교육 과정에 인문과학이 기초 학문으로 들어가야 해요. 우리나라가 미국식 교육제도를 많이 배워왔는데, 이 부분은 더 배워서 고쳐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인문교육이 대학 학부교육의 핵심이에요. 그리고 직업교육은 대학원에서 하도록 하면 됩니다. 제도 하나만 고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고 있는 거죠. 무엇이든 한번 만들어 놓으면 고치기가 힘들어집니다. (밥그릇을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니까요. 또 하나, 일반 교양으로서의 인문학도 필요합니다. 최근 대학마다 만든 최고위 과정에 인문교양 과정이 많이 개설돼 있고, 사회에서 하는 인문학 강좌에도 수강생이 많아요. 아무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변해도 자기 미래에 대해선 확실한 예측을 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어떤 합리적 사회에서도 점쟁이는 있게 마련인 거죠. 점쟁이를 자주 찾아가지 않으려면 인문적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내 원칙이 이렇기 때문에,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자신의 행동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보통 사람에게도 인문교양이 필요한 겁니다.”
-현재의 정치상황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경향신문에 마지막으로 쓴 칼럼에서 세종시와 4대강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두 개의 안건을 올해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안건이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완전히 매몰되어 버리는 게 문제예요. 지금 정권 잡은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예요. 무엇을 보도할지 선택할 때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게 없으면, 물고 늘어지며 심술 부리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지금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비판을 할 때도 전체적 차원에서 보고 세부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해야지, 이상한 속셈이 있다고 비난만 하면 문제가 생기지요. 4대강도 마찬가지예요. 강을 돌봐야 하는 건 틀림없는데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를 갖고 비판해야 합니다.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하면서 운하를 파려 한다’고 비판하는데, (현 정부가) 뭘 어떻게 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잖아요. 진보진영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많은 사람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느냐, 또 직업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에 의지할 수 있느냐가 돼야 합니다. 진보세력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단기적으로 흥분하기보다, 장기적으로 사람 사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4대강 사업에 소요되는 예산을 사회안전망 확충에 쏟으면 직접적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돈을 갖고 어떻게 (사회안전망 확충)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느냐를 고민해야지, 나눠주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단계거든요.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측면에서는 신생국가이기 때문에, 이 제도는 이렇게 만들어가자고 해야지 이걸 직접 분배하자는 것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난번 독일 총선에서 (진보파인) 사민당이 (보수파인) 기민당에 졌지요. 유럽 전체로 볼 때 사회민주주의 정책은 어느 당이나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사민주의로 정권을 잡으려 해봐야 잡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의 경우도 유럽과 달리 나라가 크고 사회공동체적 유대감이 약해서 사민주의 정책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는데, 실제 미국의 사회안전망이 우리보다 잘돼 있어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책과 자유민주주의 정책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작은 나라여서 누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외면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전통적인 유교정치론이 비록 가부장제, 권위주의, 계급문제 등을 안고 있지만 위정자는 백성을 돌봐야 한다는 점을 수백년 동안 이야기해왔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자본주의적 체제란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 더 보탠다면, 우리나라에서 진보·보수의 싸움은 진짜 정책싸움보다 지식인 구분의 장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진보 지식인이 보수파를 치고, 보수 지식인이 진보파를 치고…. 대중과는 아무 관계 없이 흘러가요. 진보·보수 싸움이 진보·보수 지식인의 싸움이 되면 안된다는 거죠. 논쟁을 하더라도 대중적 문제를 갖고 해야 합니다.”
-경향신문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해주시지요.
“비판은 당연하지만, 큰 그림 안에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가 하는 보금자리주택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던데, 요즘 정치 치고 전시효과를 노리지 않는 정치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문제삼으면 안된다고 봐요. (정책의) 동기도 큰 문제를 삼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동기가 어떻든지 (정부가) 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정말 플러스가 되는지를 봐야죠. 동기가 좋고 결과도 좋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고…. 지금은 좌우를 분명히 나눌 수 없는 시대입니다. 보수세력도 자본주의만 발전시켜 부자만 잘 살게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해서 정권 잡을 수 없고요. 어느 쪽이든 다 국가와 국민 전체를 위해서 일한다고 이야기하지요. 그 전제를 일단 받아들이되, 큰 그림을 갖고 얼마나 섬세하게 작은 부분을 비판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을 수십년째 보고 있는데, 영국 여왕이 한국에 왔을 때 한 글자도 보도하지 않았어요. 우리 언론은 떠들썩했지만…. 가디언에 여왕의 방한은 중요한 뉴스가 아니었던 거죠. 김연아 선수가 잘하는 건 박수쳐줘야 하지만, 그렇게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거든요. 이 신문만 보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 있게끔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전체적 그림과 공정성을 갖도록 언론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공정성의 문제에 민감하거든요.”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희망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다면.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교수가 한 신문 칼럼에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들어갔다. 선진국 멤버가 되었다’고 썼어요. 식민지에서 출발해 DAC에 들어온 것은 한국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낸 거죠.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이 될 텐데, 우리의 빈곤뿐 아니라 세계적 빈곤 문제 해결 없이는 세계 평화도 없을 겁니다.”
김 교수가 말을 맺었다. 나른하게 비쳐들던 햇살은 간 데 없고, 연구실엔 한기가 돌고 있었다. 떠나는 기자 일행을 그는 깍듯이 배웅했다. 노교수는 끝까지 틈새를 보이지 않았다.
▲김우창은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사회비평가이다. 하지만 이런 몇 마디로 그의 사유세계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선이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굳이 정의하자면, 정신과 문화와 지성의 힘을 믿는 인문주의자이다.
‘심미적 이성주의자’로 불리는 김 교수는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저서로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 <심미적 이성의 탐구> <풍경과 마음> <시대의 흐름에 서서> <정의와 정의의 조건> 등이 있다.

‘심미적 이성주의자’로 불리는 김 교수는 193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2005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저서로는 <궁핍한 시대의 시인> <심미적 이성의 탐구> <풍경과 마음> <시대의 흐름에 서서> <정의와 정의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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