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녀, 세정과의 모든 통신이 두절 되어 버렸다.
그녀는 속초에서의 메일로 그렇게 맺음을 해 버린 것 같다.
헛헛하고 외롭고 쓸쓸해 견디기 버겁다.
결국 그렇게 떠나버리는구나…
짜식.. 내가 저한테 뭘 어쩔거라구..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지냔 말이야..
그냥 보고 싶을 때 가끔, 아주 가끔, 한번씩 만나만 달라고 하는데..
그게 뭐 그리 나쁜거라구…
허허로운데 비까지 내린다.
문득 아내와 함께 밥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서는 옛고등학교 동창들과 골프를 치고 저녁을 먹는다.
남자 셋 여자셋 남녀공학을 다닌 민서는 다 그렇듯 친구다.
그중 한 남자친구와 잠시 야릇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건 그시절의 가슴 간질거리는
추억이다.
그친구는 변함없이 유쾌하다
저녁을 막 시작하는데, 남편 광현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을 같이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민서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어, 갈수가 없다고 했다.
어? 그래.. 알았어…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살자고는 했지만, 때로는 아내가 자기를 위해,
아주 많이 중요한 약속이 아니라면 와 주기를 바랠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나이어린 아내는 늘 자기가 먼저다…
밖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이 청승맞다는 생각에 집으로 향한다.
가면서 광현, 그는 생각 한다.
세정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만약 세정이 내 아내가 되었다면 그녀도 이랬을까?
………
서훈에게 있어 아내는, 자신의 몸 같은 존재다..
잠시 소파에서 졸고 있음, 겨울이면 추울새라 폭신한 담요를 갖다 덮어 주었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은 봄이면 얇은 옥양목 덮개를, 더운 여름이면
적당히 습도조절을 맞춘 에어컨에, 엷은 선풍기바람이 등쪽에서 불게 하여
기분 좋은 오수를 만끽하게 해 주는 그런 여자.
문득 집에서 술 한잔이 생각 날때면 요술처럼 뚝딱 입에 맞는 술안주를 만들어
내 주는 여자.
갈증이 날 때쯤이면, 물! 하기전, 코앞에 시원한 물 한잔을 말없이 내미는 여자.
한결같이, 눈부시게 셔츠를 빨아 다려 놓고, 출근길엔 늘 세탁소에서 바로 찾아온 듯
반듯한 모양의 양복을 입혀 주는 여자다.
사랑나눔에 있어서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아름답고 충실했다.
잠시 직장을 다녔었지만, 그의 바램으로 아내는 기꺼이 전업주부가 되어 주었다.
그렇듯 언제나 변함없이 그를 위해 그자리에 있어 준 여자.
그래서 더 많이 사랑 하고 아끼며 고마워 했던 아내, 세정.
그런 그녀였기에 옛남자가 마음에 자리 하고 있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녀 없이 나는 살 수 있을까.
서훈은 물러서서 자신을 바라본다.
.............................
34.
서훈 생각.
사람은 살면서 실수라는 것을 하고 산다.
나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여자’ 실수는 하지 않았다.
사실 유혹도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물론 딴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훈은 세정에 대한 애정이 깊다.
굳이 말한다면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서훈쪽 이라고 할수 있다.
서훈은 아낌없이 세정을 사랑한다 생각했고, 아내 세정 또한
그렇게 충분히 느끼고 있을거라 의심치 않으며 살았다.
그런데,
그래서 서훈의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어떻게
해 야 하 나…
헝클어져 버린 세정과의 관계를 풀고 싶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어떤 말부터 시작 해야 할까.
서훈은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나는 그녀를 믿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다.
나는 세정과 계속 살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가 풀어야만 한다.
문제 풀이 시작.
요즘은 5성급 호텔이 아니어도 시설이 잘 된 호텔들이 많다고한다.
그런 곳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로 한다.
사진과 방의 크기 등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서훈은 꽤 괜찮아 보이는 방을 예약했다.
그 건물에는 커피점, 레스토랑 일반 음식점들이 건물 아래층을 빙 둘러
앉아 있는 곳이다.
무엇을 먹든…
자리를 마련하기로 생각하고 세정의 마음을 읽어 보려 애쓴다.
...........................
세정의 생활은 겉으로는 늘 똑같다.
살림도
음식도
서훈을 출근 시킬때의 서훈 모습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아, 요즘은 버건디색 얇은 캐시미어 목도리를 챙겨 준다.
'나이가 먹어가면서는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머리도 시렵고
목도 유난히 시려워 지는 법이예요.. '그녀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이사람이.. 내가 그러면 늙은이 같잖어..’ 그랬었다.
점심을 먹으러 자켓 차림으로 사무실을 나갈때면 건물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훅! 가슴팍과 목이 움추려들 정도로 시려웠음을 기억한다.
세정의 세심함을 다시 느낀다..
퇴근.
세정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현관문을 열고 그가
들어오기를 옆으로 비켜선다..
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 딸랑 맑게 울린다.
집안의 밝고 따뜻한 공기가 새삼 감사하다.
바닥에 닿는 느낌이 시리다 느껴질 쯤 놓아진 베이지색 실내화도
발을 편하고 부드럽게 감싸주는듯 해 기분이 좋다.
서훈은 겨울에는 슬리퍼형 실내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뒷꿈치가 휭하니 허전하고 시려운 듯해 싫다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맞는 큰 사이즈의 뒤가 막힌 실내화를 사기 위해
여러군데를 돌아 다녔다.
옷을 갈아입고 저녁을 먹기 위해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잘 구워진 보리굴비, 세절 접시에 담겨진 어리굴젓, 오이지 무침,견과류 볶음,
맛갈나게 빛이 나는 알타리 김치가 하얀 접시에 담겨 있다.
서훈은 딱 요맘때의 알타리 김치를 좋아한다.
호박 감자 두부 등 작은 깍뚝 썰기 모양으로 끓여진 된장 찌게가 보글거린다.
얼마전 김장끝에 버무린 겉절이 김치까지..
세정은 ㄱ자 자리에 앉아 비닐 장갑을 끼고 굴비를 발라 서훈의
수저에 얹어 준다.
“당신은?
늦게 커피랑 빵 한조각 먹었더니 지금은 좀…”
" 음,,당신, 이번주 토요일 뭐 있나? "
세정이 굴비를 발르다 만 눈을 들고 서훈을 바라본다.
"왜요? 같이 가야 할 결혼식 있어요?"
"어? 아니, 아니…"
"특별한 뭐 없어요, 난."
더군다나 가족이 모두 집에서 쉬는 날은 그녀 또한도 외출이나
약속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알았어.. 그날 비워 놓으라구…"
밥그릇이 비워지고 적당히 누른 구수한 누룽지밥과 숭늉.
서훈은 이 누룽지와 숭늉에서 세정이 자기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술친구와 이런저런 잡담중,
'야, 우리집사람한테 언젠가 구수한 숭늉이랑 누룽지 먹고 싶다하니까
나보고 마트에 가서, 파는 누룽지를 사오라더라..
참 가보니 살기 좋은 세상이긴하더만 누룽지만도 몇가지가 있더라구..
사오니까, 뭐라구 뭐라구 궁시렁 대면서 끓여 줘서 먹긴 했는데,
우리 엄마가 끓여준 그맛이 왜 안나던지… '
이런 이야기를 들어봐도 서훈은 아내 세정을 남 보이기에도
아까운 존재다.
세정은 서훈이 먹고 싶다 하는 음식은 무엇이든지 뚝딱!
당장 만들어지는 음식은 그자리에서 바로!
시간이 걸리는 음식은 아침에 말했음 저녁상에는 반드시
고것이 식탁에 만들어져 있었다.
하여 세상 모든 여자가 결혼을 하여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면,
다 그렇게 뚝딱! 뚝딱 !자기 아내 모냥 군소리 없이 다 해주는 줄
알았다.
세정은 늘 본밥이 끝날무렵 자글거리는 누룽지밥을 놓아주고
말간빛의 따끈한 숭늉도 옆에 나란히 놓아 준다.
이걸 서훈은 엄마 같은 사랑으로 받는다.
잠시 뉴스를 보다가 서훈은 그의 방으로 들어가 하루의 마무리를
위한 경전 공부를 한시간 정도 한다.
생강 계피 대추를 넣어 우린 차를 그의 옆에 놓고 그녀가
나간다.
바빴던 하루가
기분좋은 포만감으로
평온한 하루로 마무리 지어져 가는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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